목회이야기 20230820
명례방 공동체
1784년 초겨울, 한성부 남부 수표교 이벽의 셋집에서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이 우리에게 어느정도 익숙한 이름인 이벽(李檗, 1754~1785), 권일신(權日身, 1741~1792),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을 모아놓고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식 행합니다.
이 작은 공동체의 모임은 훗날 놀랍게도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으로 기억됩니다.
이승훈은 불과 몇 달 만에 김범우(金範禹,
1751~1786?), 최인길(崔仁吉,
1765~1795), 지황(池璜, 1767~1795), 최창현(崔昌顯, 1759~1801),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등을 포함하여 모두 수십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믿음을 가진 신자들이 점점 많아지자 그 모임 장소를 수표교에서 멀지 않은 장악원(掌樂院) 앞 김범우의 집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곳이 행정구역상 ‘명례방’에 속했기 때문에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공동체를 ‘명례방공동체(明禮坊共同體)’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명례방 공동체로 모인 신자들은 체계적으로 복음을 배우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훈련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기적인 모임을 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형조 관리에게 모임이
발각되어, 공동체가 와해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1785년 봄에
일어났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일명 명례방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명례방 공동체는 안타깝게도 와해되어지죠. 하지만 복음의 씨앗을 민들레 홀씨처럼
이곳 저곳으로 날아 터를 잡고 뿌리를 내려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 땅에서 일구어 가게 됩니다.
1898년 5월 29일 명례방 공동체가 있었던 그 자리에 고딕식의 장엄한 성당이
서게 되는데 바로 명동성당입니다. 그 후로 현재까지 한국 가톨릭교회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참, 명례방이라 불렀던 조선시대 명칭은 근대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명동이요, 명동성당이 된 것입니다.
처음 명례방 공동체에서 복음을 접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시작한 정약용 선생님의 글 몇개를 소개 합니다.
1. 모두가 각자의 전장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으니 비록 타인에게서 지옥을 마주할지라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
2. 우리는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용서를 받았다 그러니 타인에게 관대하라.
3. 사람을 만나는 가장 어른스러운 태도는 사람에 대해 미리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4. 내가 타인을 가늠하며 그 깊이를 평가하듯 남 또한 내 바닥을 들여다보며 그 격을 평가한다.
5.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 저울질한다면 나 또한 인간의 마음을 잃은 도구로 변할 것이다.
6. 모두에게 똑같은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나를 잃고 남을 잃는 길이니 만장일치란 사람에 대한 모독이다.
7. 허물을 지적하는 말은 나의 잘못을 고백하듯 조심스럽게 해야 겨우 상대에게 닿는다.
8. 가까운 사이일수록 애틋하게 여기고 익숙한 사이일수록 어려워하라.
이번 주일 말씀이 이사야 56장의 말씀입니다.
여러 번 읽어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하신 까닭입니다. 성령은 그 만큼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수요 성령세미나도 두 번을 마치고 세번째 시간을 갖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이번 주에는 어떤 말씀으로 내 안에서 역사 하실까…
포항에서 갖는 수련회로 이번 수요일은 현장에서 들을 수 없지만 미리 홍목사님의 원고를 꼼꼼히 읽으며 은혜 받겠습니다.
여러분은 현장에서 경험하십시오.
이번 주 목회 이야기 사진은 명례방 공동체의 모임 장면 입니다.
그 당시 사진은 아니지만 성지역사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입니다.
이벽의 집에서 청년 선비들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둘러앉아 공부하고 있는 장면인데 눈을 크게 뜨고 정약용, 정약전, 이승훈을 찾아보시죠^^
우리 다일 신앙 공동체의 뿌리가 내려진 신앙의 터를 생각해보고, 우리가 세워갈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에 대한 소망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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