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굽히는 일
푸른나무 목자 이혜지 집사
재재와 길을 걷다 보면 재재의 다채로운 말에 나도 다양한 모양으로 반응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재재: 엄마, 나 추워.
나: 재재 추워? 자, 점퍼 단추 잠그자. (고개와 허리를 숙여 재재의 단추를 잠근다.)
재재: 엄마, 나 신발이 불편해.
나: 불편해? 뭐가 들어갔나? 어디 보자. (몸을 굽혀 재재 신발을 확인한다.)
재재: 엄마, 있잖아. 내가 어린이집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쫑알- 쫑알-)
나: 응, 어, 정말? 헤헤, 재재가 그랬다고? 그다음엔? (나보다 60cm 더 작은 재재에게 몸을 숙여 귀를 갖다 댄다.)
매일 같이 재재와 나의 말, 질문, 이야기는 이어지고 그렇게 우리는 어느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이라는 걸 몸과 마음에 각인시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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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혼자 점심을 먹다가 목사님의 새벽 설교를 들었다. 찬양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설교 말씀을 전해주었다.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백합화가 있어 평화로운 곳은 요즘 소위 말하는 ‘꽃길’에 있지 않고 가시밭에 있다. 백합화가 가시밭에 있는데 평안하다니... 몸과 마음을 굽혀 무거운 십자가를 들고 그 가시밭에 삭- 삭- 쓸리면서 자신의 마지막 길을 가셨던 예수님. 그렇게 자기 안에 있던 선함과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흩뿌리셨다. 어느 곳에나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을 수 있도록.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가졌던 가장 좋은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어주셨다. 존귀한 이가, 세상이 가장 존귀하지 않다고 여기는 자리에 가서 많은 이들을 존귀하다, 존귀하다 하시며 섬기셨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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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본다. 나에게 아직은 작고 여린 재재를 키우는 일도 어쩌면 이렇게 ‘몸과 마음을 굽혀’ 귀한 존재를 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 대신 보이는 부모로서 나의 몸과 마음을 다해 재재에게 내가 가진 가장 귀하고 값진 능력과 사랑을 내어주는 것이 아닌가.
단추를 끼워줄 때, 신발 신는 것을 도와줄 때, 재재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길거리에서 재재에게 간식을 전해줄 때, 재재의 목소리를 조금 더 선명하게 들으려 재재에게 귀를 가까이 가져가 댈 때, 나는 몸을 굽히고 재재를 바라보고 만지고 말한다. 재재가 밥을 절대 먹지 않겠다고 할 때, 놀다가 친구에게 장난감을 빼앗겨 서럽게 울 때, 놀다가 친구의 장난감을 빼앗아가 ‘내 거야’라고 우길 때, 내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데도 자꾸만 안아달라고 할 때, 시무룩해 기어가듯 잘 안 들리는 목소리로만 말하고 입을 삐죽일 때, 나는 마음을 굽히고 재재의 목소리를 듣는다.
재재의 마음 문에 노크하고 들어가 천천히 바라봐야 그제야 알 수 있는 재재의 속마음, 재재만의 세계. 작고 여리지만 놀랍게도 하루하루 건강하게 자라나는 소중한 인격체에게 몸을 굽혀 내가 줄 수 있는 손길과 사랑을 준다. 아무리 어려도 생생하게 느끼는 온갖 감정들이 온전히 ‘재재만의 것, 충분히 느껴도 괜찮은 것’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나와 남편은 자주 우리의 자존심과 권위를 내려놓고 마음을 굽혀 재재가 무대 위 주인공이 될 수 있게 재재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럴 때 오히려 우리의 자존심과 권위가 재재 앞에 더욱 선명하고 올바르게 서는 것 같다.
한없이 흐르는 사랑을 나의 눈과 표정으로 보여주고 싶을 때 나는 몸을 굽혀 재재를 안아준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슬픔을 재재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나는 마음을 굽혀 재재에게 안기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키우는 사람이 어린 존재를 위해 몸과 마음을 굽히는 동안, 이 어린 존재는 그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부모에게 온전히 내놓고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더 크고 존귀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날, 재재에게 몸과 마음을 굽혀 섬기지 못하고 실수하기도 한다. 힘겨루기, 무서운 표정으로 침묵하기, 못난 권위로 찍어 누르기, 미안하다, 고맙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단정하기……. 재재가 아직 어려서, 힘이 어른만큼 세지 않아서, 생각을 입체적으로 하기는 미숙해서 나도 모르게 함부로 말하고 바라볼 때도 있다. 실수한 것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하루가 지나가기 전 반성과 다짐의 기회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 ‘구원’의 다른 말 아닐까.
예수님이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자리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사람들을 섬기셨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자리’라고 해서 그곳에 있는 존재의 가치가 낮거나 천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상황이 어려운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인격적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있는 자만이 비로소 세상 어디에서나 마음을 열고 어떤 누구와도 값진 사랑과 용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리라. 예수님을 본받아 어떤 면에서든 나보다 못한 게 아니라 상황이 어려운 사람에게 그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고 여기도록 다가가는 움직임, “나도 선함과 섬김으로 손길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알맞은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 하는 몸과 마음의 움직임이 여기저기에서 피어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크고 작은 가시밭에도 향기로운 백합화 향기가 흘러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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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유로운 점심에,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 재재, 나, 그리고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몸과 마음을 굽히는 일’에 대한 상념에 빠졌다. 재재를 양육하면서 배우고 깨닫는 것은 이렇게 영적이기까지 하다.
제일 앞에 놓인 사진이 너무 좋습니다.
답글삭제적절한 비유인 줄 모르겠습니댜만, 로마 베드로 성당에서 보았던 피에타상의 마리아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과 손길은 다 그렇지 앓을까요?
재재와의 소소한 일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길, 그 눈길을 통해 다시금 느껴보는 주님의 사랑. 모두가 프리지아가 한껏 피어난 봄날의 풍경 같습니다.